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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논문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추천해 드립니다.

이달의 핵심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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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4차산업혁명시대와 동학사상의 역할을 특히 AI 전개와 관련한 ‘공통감성’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한 것이다. 논의는 동학의 핵심인물 최제우, 최시형의 사유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동학은 ‘지구적 사유=인간의 조건’ 즉 ‘밥, 물, 옷’이라는 공통감성 내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부적 공통감성을 활용하여 동학은, 한국전통사상과 느슨하게 호흡하면서, 상부적 개념의 얼개들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지구적 사유=인간의 조건’ 입체화한 것이다. ‘포(包), 접(接)’은 생명의 자연스런 연대를, 천지인 ‘공경(敬)’은 지구적 존재들의 위상을, ‘향아설위(向我設位)’는 생명의 근거와 생명의 방향을, ‘차차차차(次次次次)’는 지구의 법칙에 따른다는 지침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동학의 얼개는 ‘인간다움’, ‘나다움’을 발견하고, 표현한 것이고,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 인간 내적인 것이었다. 그 자체로 지구적인 차원의 내러티브이다. 동학은 AI가 전개하는 시대에도,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거나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체성이란 ‘밥, 물, 옷’이라는 공통감성이며, 그것을 중심으로 대지 위의 생명체끼리 연대를 이루고(포, 접), 기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나다움=인간다움 안쪽으로 품어서 ‘향아설위(向我設位)’로 독해하고자 할 것이다. 더욱이 초융합-초연결-초지능을 특징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에도 ‘차차차차(次次次次)’-‘불연기연(不然其然)’의 지구적 법칙을 준수하며 대지 내 시공간의 룰을 찾으며 살고자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4차산업혁명 시기, 혹은 그 이후의 시기라 할지라도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라는 기조는 변치 않고, 또 그러해야 동학이 동학다울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의 자기 증언에 나타난 주체의 형상

정우봉 ( Chung Woo-bong )
근역한문학회|한문학논집  52권 0호, 2019 pp. 63-98 (총 36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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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전환기의 큰 분수령을 이루었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그동안 문학 방면에서는 동학가사, 민란가사에 관한 연구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연구 성과가 제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논문에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참여했던 인물들이 작성한 자기 증언 기록들에 새롭게 주목하였다.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역사의 현장을 함께 했던 인물들이 남긴 기록들, 특히 동학 농민 지도자들, 특히 金亨鎭, 鄭伯賢, 朴鶴來, 金洛喆, 全琫準의 자기 증언 기록물에 담긴 생생한 목소리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서 참여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이후 각기 다른 행로를 보여주었다. 이들 인물들을 포함하여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활동했던 이들이 남긴 자전적 기록은 동학농민혁명이 특정 지역에서 어떠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갔는가를 살펴 보는 데에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 논문에서는 이들 자기 증언의 기록물들이 단순히 과거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는 자료로서 활용되는 것을 넘어서, “삶이 자서전보다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서전에 의해 삶이 구성된다.”는 말에서 보듯이,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고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던 과정에 보다 주목하였다. 기억을 통해 주체가 구성되는 양상을 분석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이 논문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의 자기 증언에 나타난 주체의 형상이 어떠한 것인가, 그리고 혁명에 대한 기억이 근대의 주체를 어떻게 구성하고 만들어나갔는가 하는 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동학, 미완의 혁명과 엇갈린 공감의 그늘

김경호 ( Kim Kyung-ho )
한국철학사연구회|한국철학논집  68권 0호, 2021 pp. 91-119 (총 29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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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논자의 주요한 관심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19세기 중후반 조선 사회의 기층에서 믿음의 대상으로 등장하였던 ‘동학’이 어떤 이유로 반외세 반봉건을 표방한 ‘전쟁’ ‘혁명’으로 전환되었고, 그 힘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둘째, 미완의 혁명으로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동학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호명되었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동학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논자는 죽음과 절멸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딛고 창의(倡義)를 통해 혁명전쟁을 수행했던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역동성을 ‘저항적 집단감성’으로 포착한다. 동학운동이 서학과의 대척점에서 폭정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농민을 비롯한 광범위한 하층민을 결집하고, 평민지식인들과 연대하면서 유례없는 혁명전쟁을 전개했다는 것은 새로운 설명 방식을 요청한다. 시대의 전환기에서 분출했던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집단적 감성과 그러한 변혁의 과정에 참여했던 주체들의 경험과 자각은 논리적이고 분석인 방식만으로 포착 불가능하다. 따라서 논자는 기존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는 연대기적 사건 분석의 방식을 최소화하고 다양한 형식의 기록 매체를 검토할 것이다. 이것은 기록 매체를 단지 발화자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결국, 논자는 동학운동과 관련하여 호남지역에서 생산된 기록 매체를 감성철학의 관점에서 독해하고, 기록물을 작성한 기록 주체와 기록 대상이라는 타자 사이에 구축된 긴장과 공감의 엇갈린 지형을 탐색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동학운동의 과정에서 출현하는 감성적 주체들의 등장과 새로운 감성기억에 대한 재해석의 단서를 제공한다.

동학농민혁명기 나주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김봉곤 ( Kim Bongg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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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나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재조명을 위해 나주수성군의 실체는 어떠하였으며, 수성군의 활동은 나주수성단계와 호남 초토영 단계, 일본군진출기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동학농민혁명기의 나주지역은 관찬사료와 고문서, 개인문집, 일본군 측 사료를 통해 볼 때 동학농민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주 수성기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처음에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의 지원을 받았으나, 전라병영의 군사들이 빠져나가자, 전라 우영의 영장 이원우(李源佑)와 아전들의 도움을 받아 수성군을 편성하였다. 나주는 전라우영으로서 군관과 병사를 갖춘 상시적인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킬 수 있었다. 또한 나주지역은 1710년(숙종 30)부터 변란에 대비한 이노작대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아전들과 관노로 구성된 수성군이 손쉽게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원군 집권 이후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적된 화포나 군수물자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수성군의 조직은 아전과 군교 등의 지휘부, 주력부대인 포군, 일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포군은 전, 중, 후군 등 200명이며, 1,000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24개의 초로 나뉘어 나주성 경비와 수리, 군량미 보급 등에 종사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공격했으나, 대패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민종렬와 이원우를 파직코자 했으나, 나주 수성군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탈환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9월부터 11월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으나, 화력의 부족과 전술의 미흡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나주수성군은 600명에 달하는 포군을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응용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포차의 개발로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단계는 호남초토영기(湖南招討營期)이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소모사, 호남 초토사의 직함이 부여되어 나주 수성군의 활동 반경은 남평이나 무안, 영암, 영광 등지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또한 초토사 민종렬은 관할 구역에 향약을 실시하여 교화를 통해 동학농민군 수뇌부 외에는 죽이지 않는 유화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전라도 전역에 4읍 작통제(四邑作統制)를 실시하고, 작통에 대한 규칙을 두어 함부로 동학농민군을 살상하지 않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투시에도 수성군의 동학농민군 살상이 20명이 넘지 않는다고 평가될 정도로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셋째 단계는 일본군 점령기이다. 1895년 1월 5일(양력)부터 2월 10일까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나주의 정토군 본부에 상주하여 일본군과 관군, 나주수성군을 총지휘하면서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처히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서남해안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은 2,000명 이상이 죽어갔으며, 나주에서도 최소한 230명이 학살되었다. 나주관아도 일본군이 장악하고, 4대문도 일본군이 수비했다. 이 때문에 나주목사 민종렬은 관아가 아닌 객사 옆의 노반청에서 머물게 되었다. 잇달은 일본군의 부녀자 겁탈이나 재물 약탈에 대해서도 민종렬이나 나주영장 이원우가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였다. 나주수성군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지평 민보군 연구

박상진 ( Park¸ Sang-jin )
강원사학회|강원사학  35권 0호, 2020 pp. 49-78 (총 30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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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9월경에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함에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 내에도 동학농민혁명이 확산되었다. 지평지역에서는 향촌사회를 수성하려는 목적으로 지평현감과 전직 관리인 맹영재가 향약의 외피를 두른 군사조직을 결성하여 도의 경계를 넘어 경기지역과 강원도 홍천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제압하였다. 지평지역은 향약을 매개로 지역 사대부들이 결집하여 포수를 동원함으로써 효과적으로 군사조직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지평지역은 동학농민혁명 시기 이전부터 화포계를 중심으로 양성한 포수들이 민보군의 주요한 인적기반으로 작용하였다. 경기감영에서 부족한 인력과 물력은 지평관아에서 자체적으로 동원하여 민보군을 운영하였다. 지평 민보군은 양호도순무영의 지휘를 받으며 체계적으로 활동하였다. 지평 민보군은 주로 경기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처형하였으며 경기도 군현의 의병소를 통합적으로 지휘하였다. 10월 말에는 강원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차기석계 농민군에 대항하여 벌인 홍천 풍암리전투에서 승전하였고, 영월·평창·정선지역에서 대규모의 연합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지평 민보군은 강원지역에서의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관군을 지원하는 범주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지역의 민보군을 자체 병력에 흡수하거나 함께 작전을 펼쳤다. 황해도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순무영의 전령을 받아 황해도까지 원병을 가기 위해 대응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항일 기운이 고조되자, 1895년 11월 말에 지평 민보군의 포군대장 김백선과 휘하에 있는 포수들이 재결집하였다. 김백선과 지평의 포군은 유생층과 함께 지평의병을 창의하였고, 호좌의진의 기반이 되어 항일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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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10월부터 2017년 5월 사이의 ‘촛불 혁명’은 시민이 직접 나서서 부당한 정치권력을 교체하고 헌법적 가치를 옹호함으로써 시민이 주권자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되살린 것이다. 그래서 ‘촛불 시민혁명’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치권력이 교체된 후 시민이 쟁취하고자 한 경제적 안정, 사회적 공정, 정치적 참여, 교육의 인간성, 문화적 다양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사회 개조의 구체적 프로그램 제시와 그 실천은 제한적 성과만을 거둔다. 이 글은 ‘촛불 시민혁명’ 이후 사회개혁이 이처럼 지체된 연원을 찾아 보려고 한 것이다. 이 작업은 촛불 시민혁명이 혁명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아가 혁명이 사회를 민주화하고 인간의 권리를 제도화하는 집합적 행동이라면 혁명은 바로 민주주의나 인권과 어떻게 구분되며, 또 어떤 맥락에서 서로 연결되어 인간의 문명을 한 단계 고양해가는 것인지 그 주요 프로세스를 ‘프랑스 혁명’과 ‘동학 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동학 혁명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혁명은 삶의 근본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민주주의 이념의 발견이자 옹호이며, 민주주의를 일상생활에서 실현하기 위해 기본적 권리를 승인시키고 제도화하려는 열정적인 집단 행위로 정리한다. 바꿔 말해 혁명은 경색된 사회경제적 상태나 부조리한 삶의 조건을 과거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함으로써 다수 주권자의 통치로서 민주주의를 틀 짓고, 사람 사이의 새로운 관계 형식을 권리로서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발명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성취하며, 제도화된 인간의 권리를 통해 사회생활에서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내재적 논리를 확인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살핀 혁명, 민주주의, 인권이 유기적으로 관련하는 내재적 논리와 현실 작동 모형은 근대 부르주아 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추상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모든 층위에 걸쳐 부르주아가 형식적, 실질적 포섭을 완성하여 헤게모니의 정점에 서있는 ‘지금 여기’라는 역사적 조건에서 혁명, 민주주의, 인권의 실천을 아울러 전망한다.

동학소설에 나타난 혁명 주체로서의 민중

우수영 ( Woo Soo-yo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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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소설은 한국 민중의 현실 각성과 연대 실천의 과정을 여실히 담고 있는 영역이다. 이러한 동학소설에서 나타난 혁명 주체인 민중의 모습은 당대 어떤 요청을 바탕에 두고 형상화되었는지를 살펴 민중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 연구에서는 먼저 시대가 요청하는 민중의 개념은 무엇이며 또한 그를 배경으로 생산되었던 동학소설의 민중의 형상화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폈다. 지금까지 한국 소설에서 등장했던 ‘동학’이 의미 변동 없이 역사적 배경으로 해석되던 상황에서 벗어나, 동학소설은 당대 요청된 민중 논의 아래 혁명 주체로서의 민중의 변모를 담지한 소설 내적 담론이었다. 동학소설에서 드러난 혁명 주체로서의 민중의 변모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영웅의 지도로 인해 혁명에 동참하고 따르는 미각성의 민중, 각성한 전략적인 민중, 혁명 자체를 삶(生)의 진리이며 생명 본연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민중이 바로 그들이다. 이와 같이 본 연구에서는 동학소설에서 나타난 혁명 주체인 민중을 시기별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동학소설은 세계의 억압에 저항하는 혁명 주체로서의 민중을 시기별로 형상화함으로써, 비완결적이고 개방적인 소설 장르의 종결불가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가치를 발현한 장르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기록학적 가치 제고 방안

홍성덕 ( Hong Seong-d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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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문화재청은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2018년 3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World)’의 등재신청대상으로 결정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역사적 전환을 이룬 사건이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재정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동학란’을 ‘혁명’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는 암울한 역사적 기억의 현재화 과정이며, 지속적인 자료의 발굴을 통해서 가능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모든 기록물을 가리킨다. 본고는 2018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175종의 기록물에 대한 기록학적 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탐구하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특정 주제에 의해 정리 분류된 수집기록물이다. 기록물의 생산 정보와 무관하게 기록물은 여러 기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으며, 기록물 사이의 맥락정보도 분명하지 않다. 기록물 가치를 증대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기록물 조사를 확대해야 하며 기록 상호간의 연결 정보를 파악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수집된 기록물은 ISAD(G)나 ISAAR(CPF)와 같은 국제표준을 기반으로 기술규칙을 개발하여 정리한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보존 실태를 고려할 때 기술규칙에는 각기 다른 소장기관의 기록물 정보를 연결할 수 있는 방안이 고려되어야 한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개념을 현재 꾸준히 생산되는 조사ㆍ연구ㆍ기념사업 등의 기록물까지 확장하여 정리해야 한다. 현용기록들에 대한 기록관리학적 측면의 정책 수립과 시행이 선행될 때 동학농민 혁명기록물의 가치는 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설계공모에 나타난 메모리얼 설계 경향

이진욱 ( Lee Jin-wook ) , 성종상 ( Sung Jong-sang ) , 손용훈 ( Son Yong-hoon )
한국조경학회|한국조경학회지  45권 3호, 2017 pp. 66-79 (총 14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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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성을 구현하기 위한 형태와 기법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가운데 지난 2014년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설계 공모가 진행되었다. 이는 집단의 기억을 강요하던 기념(記念) 사업에 대한 재고의 과정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계획하고 있는 메모리얼 설계에 대한 동시대 설계가들의 인식을 고찰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소재이다. 본 연구는 동일한 대상지에서 이뤄졌던 동학기념사업들에 대해 시계열적으로 그 형성 배경을 살펴보고, 기존의 문헌 연구 등을 통해 설계공모를 분석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를 통해, 과거 정치적 목적의 수단으로써 조성되던 기념물이 공개공모를 통해 다양한 의견 수렴과 형태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다층적 분석을 통해 마련된 분석의 틀은 일상성, 상호작용 및 자발성, 추상성, 임시성, 장소성, 통합성 그리고 조화성이다. 이를 통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상 속에서 기념성을 전달하기 위해 기존의 특수성을 갖는 산재한 기념공간들을 일상적 활동 프로그램과 연계하였다. 둘째, 기념물과의 상호작용을 위하여 직접적인 참여와 감성적인 체험 방법을 사용하였다. 셋째, 추상적 재현을 위해 색상, 수직요소, 군집화, 공원의 틀 조작 등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넷째, 임시성과 변화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식물을 이용한 애도의 방식과 물리적 변화가 가능한 건축물과 구조물들을 도입하였다. 다섯째, 대상지를 장소성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과거 지형을 복원하고, 현장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여섯째, 기존 기념물들과의 연계성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순환동선과 축선 조작 기법을 사용하였다. 일곱째, 주변과의 조화를 위하여 지형에 순응하는 동선과 건물을 배치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의 처형 경위와 순국 터

박대길 ( Park Daeg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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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said that Jeon Bong-Jun(全琫準), Kim Gae-Nam(金開南), Son Hwa-Jung(孫華仲), Kim Deok-Myeong(金德明) and Choi Gyeong-Seon(崔景善) who were major figures of The Dong-hak Peasant`s revolution are `Five Leaders.` Four people, excluding Kim Gae-nam, were tried by the judical procedures, at least formally, left records of interrogation or judgment, and hanged in Seoul. They had the opportunity to proudly revealed the purpose and meaning of the revolution of Donghak Peasants which they took the lead. However, Kim Gae-nam did not even have the chance to express his will, as well as the judical procedures. Jeonragamsa(全羅監司) summarily executed Kim Gae-nam for the reason of `Escape and Rescue` and clearly wrote down the place of execution as “In the 20th of the 24 periods of the day, on the third of this month(December), gathered soldiers and people in Segyojang(西敎場), decapitate and expose his head, put it in a chest and sent it to Dosunmuyeong(都巡撫營) …” Thus, it shows the justification for Kim Gae-nam`s summary execution, the place and time of it, disposal of his body, and so on. However, contrary to `Escape and Rescue`, it is highly possible that the connection with DaewonGun(大院君) could be a decisive reason. Kim Gae-nam caused a second uprising to drive out the Japanese army and seize power. But there was communion with DaewonGun in his decision for uprising, which was an open secret at that time. Prejudication, that Kim Gae-nam who tried to reveal this publicly could cause another trouble if left untouched, made him be executed in haste. It was a very simple place to identify right away where Kim Gae-nam died for the country. Nevertheless, the background of the rise of Chorokbawwi(초록바위) view(theory) which has never been suggested any evidence was because of the name of the place that are not confirmed. In other words, this was a consequence of overlooking `Dongsoyimyeong(同所異名)`, which means the same place can be called differently such as Seokyojang(西敎場), Jangdae(將臺), under the Kongbukru(拱北 樓), and Supjeongi(숲정이). Therefore, the place of Kim Gae-nam`s death for the country is Supjeongi that is now called a representative Catholic Martyrs` Site, after Seokyojang was closed and neglected, as well as Seokyojang, Jangdae, under the Kongbukru in the record of 1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