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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후보
농민항쟁의 측면에서 본 1946년 10월사건 경북 영천의 사례연구
김상숙
기억과 전망 25권 114-153(40pages)
UCI I410-ECN-0102-2012-340-002828239
* 발행 기관의 요청으로 무료로 이용 가능한 자료입니다.

1946년 10월 대구항쟁이 일어난 뒤 영천의 항쟁은 10월 2일 밤부터 시작하여 며칠간 지속되었다. 영천항쟁은 다른 지역에 비해 항쟁에 다수의 인원이 참여했고 항쟁 강도가 상당히 높았다. 영천항쟁은 대구에서 군 단위 → 면 단위 → 마을 단위로 순차적으로 전파되었는데, 이와 같은 전파형태를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면, 지역 자체에 외부의 영향을 신속하게 수용하여 마을 단위로까지 전파할 수 있는 군 단위, 면 단위의 주도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영천항쟁은 군 인민위원회 등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 친일세력이나 미군정의 식량공출정책을 반대하는 다양한 층들이 참여했다. 항쟁 주도층을 몇 갈래로 나눠보면 첫째, 항일운동을 했던 지식인, 지역 명망가들로 구성된 군 단위 지도자급 인사들이 있다. 둘째, 면 단위·마을 단위의 지도자나 여론 주도층을 들 수 있다. 이 두 부류의 인사들은 지주, 지식인층, 마을유지들로서 항쟁 당시 연령대도 다소 높은 편이었다. 셋째, 청장년층으로 상인과 학생, 소작농민이나 하층민 가운데 행동세력으로서 선봉대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항쟁에 다양한 인사들이 함께 참여했다는 것은 영천항쟁이 특정한 계급의 틀을 넘은 전선(front)의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계급적 동질성에 의해 결합한 하층민 조직, 일가주의적 동질성에 의해 결합한 친족공동체, 마을 자치조직의 전통 등이 사회경제적 원인이나 이념적 요소의 기저에서 이러한 전선 형성을 위한 일상적 조직화의 기반이 되었다. 1946년 10월에 일어난 영천항쟁의 양상은 조선 후기에 발생했던 전통적 농민항쟁과 흡사한 면이 있다. 특히, 1946년 영천읍 항쟁은 1894년 영천항쟁의 전개형태와 유사한 면이 있다. 항쟁의 주도조직인 인민위원회 등의 참여인사를 보면 조선 후기 농민항쟁의 주도조직인 ``향회``와 유사한 특성을 보이고 있었으며, 항쟁의 선봉대가 되었던 하층민의 노동조직도 당시 농민항쟁의 주도조직인 ``초군(나무꾼)``들의 조직과 유사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물론 전통적 항쟁에 비해 1946년 10월항쟁에는 외래적 힘의 규정력이 훨씬 더 중층적이고 막강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미군정기에 지역공동체의 외부세력에 의해 전파되었던 영천항쟁 속에는 불과 반세기 전 지역 농민들이 수행했던 전통적인 항쟁의 경험들이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있었다.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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